미술

프랑스, 스페인, 독일의 르네상스

그림 읽어주는 남자 2025. 5. 5. 19:51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프랑스와 독일을 넘어 네덜란드와 잉글랜드 및 북유럽까지 퍼져나갔고, 그 영향력은 스페인까지 전달되었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15세기 후반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침공하였는데, 당시 프랑스 왕국과 다소의 경쟁관계에 있던 부르고뉴 공국이 이탈리아와 각종 교역을 진행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를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 과정을 통해 당시의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프랑스로 활발하게 유입되면서 프랑스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그런 가운데 장 클루에(Jean Clouet, 1480~1541년)와 그의 아들 프랑수아 클루에를 비롯하여 로소 피오렌티노,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쵸 등 이탈리아 양식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1531년부터 퐁텐플로派를 형성하였다. 
 

장 클루에의 <프랑수아 1세의 초상, 1535년>

 
미술사학자들은 프랑수아 1세(1515~1547년)부터 앙리 4세(1589~1610년)에 이르는 시기의 프랑스 미술을 동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과 묶어서 매너리즘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매너리즘 양식의 미술에서는 성서나 고전 고대 신화를 주요 주제로 마치 이야기를 풀어가듯이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퐁텐프로派가 주도했던 프랑스의 르네상스는 매너리즘을 거쳐 선정적인 주제를 주로 표현했던 에로틱 매너리즘 단계로 진화하였고, 훗날 바로크 미술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다.
 

프랑수아 클루에 <욕조에 든 여인, 1570년> 워싱턴 국립 미술관 소장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는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특히 건축학적으로는 여전히 고딕 양식을 고수했고, 이탈리아식 양식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미술 분야에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받아들인 사람은 알브레이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년)이다. 그는 뉘렌베르크에서 견습생 생활을 시작했고, 1490년부터는 독일과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을 한 몸에 흡수했으며, 다시 독일로 돌아와 르네상스를 독일에 소개했다. 
 
그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면서도 구교파와 신교파 모두로부터 의뢰를 받아 성모 마리아와 카톨릭 성화들을 그렸고, 훗날 그는 '북유럽의 레오나르도'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는 헌사를 받기도 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기도하는 손>과 <자화상> 등이 있다.
 
당시 독일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성립의 기반이 되는 고전, 고대(그리스/로마)의 인문주의적 전통이 다소 결핍되어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로 일어난 30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로서 전쟁으로 인한 국토의 황폐화와 경제적인 후진성으로 인해 독일의 르네상스는 그들만의 개성과 독창성은 만들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전적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 예술을 추종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알브레히트 뒤러의 대표작 <기도하는 손>

 
하지만 스페인은 좀 달랐다. 당시 스페인은 이사벨라 여왕이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와 공동 군주로서 그라나다를 점령했고, 이교도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의 지배를 종식했으며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스페인 통일의 기초를 마련한 카톨릭 군주이기도 했다. 이 두 사람의 통일 스페인은 기존의 미약했던 왕권을 굳건하게 갖추었고 이를 바탕으로 각 지역의 봉건 귀족들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스페인의 르네상스 건축은 강력한 카톨릭 군주의 든든한 지원 하에서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가운데, 카스티야 지역을 지배했던 고딕 양식과 이슬람의 무어양식이 가미된 스페인 특유의 플라테레스크(Plateresco) 양식 등이 혼재된 형태로 나타난다. 한마디로 플라테레스크 건축양식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과 달리 풍부한 장식적 벽면과 고전적 디테일 위에 무어풍 무늬의 타일로 바닥이나 벽면을 장식하고 정교하고 섬세한 부조가 벽면을 뒤덮는 형태가 주류를 이룬다.
 
그 대표적인 건축물이 바로 그라나다 대성당인데, 1523년에 건축이 시작되어 1703년 마무리될 때까지 약 180년이 걸린 건축물로서, 고딕과 르네상스 양식 등 다양한 건축 양식이 녹아 있으며, 내부 장식은 이슬람풍의 무데하르 양식을 따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성당 내부에는 흰색 대리석의 코린트식 대리석이 세워져 있으며, 천장에는 식물을 형상화한 아라베스크 문양이 새겨져 있는 등 여러 양식이 혼재되어 반영된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고딕과 무어 양식이 결합된 플라테레스크 양식의 그라나다 대성당 내부

 
건축과 달리 회화의 경우는 원근법의 사용이라든지 색과 음영의 표현 등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는 편이었다. 그 대표적인 화가 중의 한 사람이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년)이다. 그리스 출신이었던 그는 처음에는 비잔틴 회화를 배웠지만, 20세 무렵에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베네치아派 화가들로부터 풍부한 색채와 깊이감 있는 명암의 표현법을 습득했고, 30대 후반인 1577년에 스페인 카톨릭의 중심이었던 톨레도로 이주한 이후 종교에 기반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엘 그레코의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 The Disrobing of Christ, 1579년>, 톨레도 대성당 소장

 
엘 그레코가 톨레도 대성당의 사제장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완성한 첫 작품이 바로 <그리스도의 옷을 벗김>이라는 작품이다. 그 외에도 그는 <십자가의 예수와 두 기증자>나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같이 영적인 세계를 주제로 한 성화를 많이 그린 편이었고, <오르가스 백작의 매장> 같은 초상화나 <톨레도의 풍경> 같은 풍경화를 그리기도 했다. 
 

엘 그레코의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 1582년>

 
하지만 그의 독특한 표현과 작품세계는 그에게 작품을 주문한 주문자들을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펠리페 2세의 경우도 그에게 제단화 <성 마우리티우스의 순교>를 주문하였지만, 다소 비현실적이며 시간을 초월한 표현방식 그리고 다소 챙백한 비자연적인 색채 등으로 인해 황제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결국 이 그림은 제단에 걸리지 못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회화를 시작했던 엘 그레코는 후대 미술사학자들로부터 전형적인 매너리즘의 대표 화가로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의 광기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통해 재해석 되기도 했으며, 19세기 이후의 전위적 화가들은 그의 독보적인 상상력에 매료되어 그를 자신들의 선구자로 칭송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