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4년 4월, 프랑스 파리 카프신街의 나다르 사진관에서 피사로, 모네, 시슬레, 드가, 세잔, 르누아르, 모리조, 기요맹 등의 화가들이 모여 첫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이 전시회를 본 미술 미평가 르루아가 '이들은 그저 인상을 그리는 일당'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소감을 늘어놓게 되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에 대해 '인상파' 또는 '인상주의'라는 수식어가 쓰여지기 시작했고, 인상주의는 오늘날 서양미술사에서 19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미술사조로 평가받게 된다. 이 전시회는 1888년까지 8회에 걸쳐서 개최되는데, 나중에는 고갱도 전시회에 참여하게 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인상주의는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형태의 변화를 포착하려는 미술양식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빛에 따라서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사물의 인상을 표현하려는 미술이다. 따라서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사물의 모습을 포착하기 위해 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색채 표현에 있어서도 시각적인 착시효과를 이용한 색채분할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이에따라 인상주의 회화에서는 신고전주의와 같은 재현적인 사실적 묘사가 더이상 의미가 없어졌다.

인상주의 회화에서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은 프레드릭 바지유(Frédéric Bazille, 1841~1870년)이다. 그는 작업실 내에서 기억이나 상상에 의지해서 풍경을 그리던 방식이 아니라, 야외에 나가 직접 자연광 아래에서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방식인 앙플레네르(en plein air)를 고집함으로써 기존의 미술양식과 구분되는 인상주의 회화의 정체성을 만든 인물이다.
그는 어릴적부터 미술과 의학 공부를 병행했지만, 의사시험에 여러번 낙방하면서 결국 화가로서만의 외길 인생을 살게 된다. 1862년, 21세때 파리로 진출한 그는 르느와르와 시슬레 등과 어울리면서 앙플레네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을 그렸다. 하지만 그는 1870년 프랑스군에 입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했다가 약관 28세의 나이로 불행하게도 전사하고 만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가족재회>와 <여름풍경, 1869년> 그리고 <콩다민街에 있는 화가의 작업실, 1870년> 등이 있다.

하지만 인상주의 화가들 모두가 앙플레네르를 고집했던 건 아니다. 인상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년)는 야외의 자연광 아래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뛰어난 데셍 화가이기도 했던 그는 특히 발레리나 그림을 많이 그렸다. 초기에는 <보나의 초상> <꽃을 든 여인> <이오 부인> 등의 초상화를 많이 그리다가, 차츰 무용과 극장 등 근대적인 민중들의 생활을 묘사하기 시작했으며, 움직이는 것들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그림으로 표현하는 독자적인 화풍을 만들어 낸다. 아마 그가 그림에서 순간적인 포착을 선호했던 것은 36세때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드가가 1874년에 완성한 <발레 수업>은 발레교사 쥘 페로의 평가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무용수들을 묘사한 그림으로서, 그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무용수들을 수없이 드로잉하면서 이 그림을 끈기있게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평소 네덜란드 화파를 존경했던 드가는 그들처럼 일상적인 삶에 새로운 위상을 부여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알고있는 또 한 사람의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 1841~1919년)는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도자기공장에서 견습생활을 시작한다. 1862년 파리 국립고등미술학교에 입학한 그는 스위스 화가 '샤를 글레르'가 운영하는 공방에 문하생으로 들어가 동료인 바지유, 모네, 시슬레 등과 교류를 가졌으며, 함께 퐁텐블로의 숲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우정을 쌓는다.
그의 초기 화풍은 인상주의 영향을 많이 받았지만, 1881년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라파엘로에 경탄하고, 폼페이의 벽화에 가명을 받은 그는 섬세한 고전주의적 느낌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림 그리는 모네>와 <라 그르누예르> 같은 그림에서는 로코코 시대의 느낌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 등의 생깔을 선명하게 칠하여 색채 화가로 불리기도 했으며, 특히 적색의 표현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늘그막에 그는 만성 신경통에 시달렸으며, 일흔이 넘은 뒤에는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손이 마비되었지만 붓을 입으로 물고서 그림을 계속 그리기도 했다.

그가 만년에 남긴 작품 중 하나인 <목욕하는 여인들>은 근대 회화의 명작으로 꼽힌다. 특히 그는 일생동안 <목욕하는 여인>의 그림을 많이 남겼는데, 초기의 그림들은 회화적으로는 균형있지만 실제로는 거의 비현실적인 모델들의 포즈, 깔끔하고 조화로운 아카데믹 스타일의 여인들을 그린 특징과 다소 신고전주의적인 느낌마저 자아내지만, 후기의 그림들에서는 훨씬 더 살집있고 풍만한 여인들을 대상으로 형태보다는 붉은 색감이 더욱 강조되고 붓터치의 정교함이 사라진 대신 더욱 역동적인 모습으로 바뀌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 학습된 인상주의 스타일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창적인 개성이 더욱 많이 반영된 결과가 아닐까 싶다.
인상주의의 문을 연 인물이 마네라면, 초기 인상주의의 하이라이트를 차지할 인물은 바로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년)이 아닐까 싶다. 그는 프랑스의 대표적 화가이며 현대 미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1839년 남프랑스의 액상플로방스에서 태어난 그는 은행창업자인 아버지의 풍족한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법학을 전공하길 희망했지만, 미술이 좋았던 그는 아버지의 바램을 저버리고 파리로 미술공부를 떠난다.

세잔은 파리에서 인상파 화가인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게 된다. 그의 초기 작품은 어둡고 격정적인 상태를 에로틱하게 표현하여 다소 환상적인 분위기를 주는 화풍이었으나, 카미유 피사로의 외광효과에 자극받은 이후로는 매우 밝고 화사한 화풍으로 변화해 간다. 그리고 그는 살롱에 출품한 작품들이 모두 낙선의 고배를 마시게 되자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조금씩 형성해 가기 시작한다.
특히 그는 "자연은 표면보다 내부에 있다"라고 말하면서 보다 정확한 묘사를 위해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로 근본적인 물체의 파악, 즉 자연의 형태가 숨쉬고 있는 내적 생명을 묘사하는데 궁극적인 목적을 두었다. 한마디로 그는 사과 한 알로 파리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는 소재(사과)가 지닌 형태적 특성을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 '다중'시점을 사용했고, 그림이 3차원 입체가 아닌 2차원적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원금감마저 과감히 없애 버렸다. 한마디로 그는 르네상스 이후부터 줄곧 서양미술의 교과서와 같았던 원근법과 인상주의가 가졌던 순간적인 감각마저 과감하게 탈피한다.

또한 색채를 단순히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도구가 아니라, 형태와 공간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로 사용했다. 즉 그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gradation)를 통해 깊이와 구조를 표현했는데, 이는 빛과 색의 순간적 포착을 추구하는 인상주의보다 더 분석적이고 의도적인 것이었다. 그림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을 보면, 색채와 붓질이 인물과 배경을 통합하여 평명과 입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획기적인 시도로 형태/색채/공간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탐구하며 현대미술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그의 화풍과 회화적 접근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여러 사조, 입체파와 추상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며, 19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서 입체파의 아버지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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