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후기 인상주의, 세잔과 고갱

그림 읽어주는 남자 2025. 7. 13. 09:11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의 출발은 1910년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가 기획한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라는 전시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영국 런던의 그래프톤 갤러리에서 열린 이 전시회는 세잔, 고흐, 고갱 등의 유작 100여점이 전시되었는데, 사실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인상주의'와 달리 유럽 각지에서 주목받았던 20세기 초까지의 진보적인 화가들을 아우르기 위해 고안된 것일뿐, 하나의 그룹이나 공통된 작업 스타일을 지칭하는 용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 화가 대부분 초기의 화풍은 인상주의 선배들의 지도와 격려로 형성된 것은 분명하므로 후대 비평가들은 기꺼이 후기 인상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

 

세잔의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 1888~1890년> 워싱턴 내셔날 갤러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다 뒤늦게 화가의 길로 들어선 폴 세잔(Paul Cézanne, 1839~1906년)은 초기에는 들라크루아 풍의 낭만주의 소재와 표현에 관심을 가졌다가 1870년 이후로는 피사로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외광파' 회화를 주로 그렸으며, 1874년에는 인상파 단체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잔은 초기 인상주의 화가인 모네나 르누아르와는 다른 화풍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들면 모네류의 가볍고 우아한 투명함 대신에 여러 번의 붓질로 색을 중첩시키는 신중함과 무게감을 중시하는 스타일이었다. 

 

세잔의 <과일접시가 있는 정물, 1879~1880년>

 

특히 그의 작품 <과일접시가 있는 정물>을 보면, 접시와 과일, 식탁보, 나이프와 테이블, 유리잔과 벽지 등 모든 소재들이 화가의 세심한 터치로 이루어져 있고, 원근법과 형체를 파괴한 고른 붓질과 기하학적인 접근 그리고 광학현상에 대한 탐구 등으로 훗날 그는 입체파의 아버지로 평가되기도 한다. 

 

한편, 그의 작품 '빨간 조끼를 입은 소년'은 2008년 스위스 취리히의 개인 박물관인 에밀 뷔를레 콜렉션에서 3인조 무장 복면강도에 의해 도난당했다가 4년만에 회수되기도 하는데, 당시 호가가 약 1억1000만 달러(한화로 약 1254억원)에 달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년> 보스턴 미술관 소장

 

후기 인상파이면서 脫인상주의 화가로 불리는 폴 고갱(Paul Gauguin, 1848~1903년)은 탄생과 성장과정부터 드라마틱하다. 1948년 진보성향의 언론인이었던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스는 나폴레옹 3세가 권력을 장악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가족을 이끌고 해외로 향한다. 목적지인 페루로 향하던 중 아버지는 사망하고, 어린 남매를 데리고 페루에 도착한 미망인 알린 고갱은 1854년까지 외삼촌의 도움으로 살아가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지방과 파리의 여러 학교를 거친 고갱은 오를레앙의 잔다르크 학교를 졸업한 후 상선의 도선사로 취직한다. 그리고 3년 정도 도선사 일을 한 후 프랑스 해군에 입대, 약 2년을 복무한다. 그리고 복무를 마친 고갱은 1871년 파리로 돌아와 증권회사에 취직한다. 그 후 약 11년간 증권중개인의 삶을 살던 그는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미술품 거래로 큰 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다 카미유 피사로와 친분을 맺은 그는 간간히 폴 세잔과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으며, 1882년 마침내 증권회사를 관두고 전업 화가로서의 새로운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화가로서의 새로운 삶은 매우 힘들기만 했다. 덴마크 출신의 아내도 고갱의 수입이 줄어들자 다섯 아이를 데리고 친정인 코펜하겐으로 떠난다. 고갱도 가족을 따라 코펜하겐으로 떠나지만 1년만에 막내아들 클로비스만 데리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다. 초기에 그는 프랑스 서부의 퐁타방 지역에서 젊은 작가들과 함께 작은 단체를 조직, 인상주의에 반대하며 단순하고 강한 윤곽선과 평면적 색면을 구사하는 새로운 화풍에 도전하지만 미술계의 주목을 받지는 못한다. 

 

고갱의 <황색의 그리스도, 1889년>, 미국 버팔로 AKG 미술관 소장

 

그러던 중 고객은 퐁타방의 모임을 주도하던 인물인 찰스 라발(Charles Laval, 1862~1894년)로부터 들은 파나마와 마르티니크의 이국정 풍광에 대한 이야기에 자극을 받고 파나마 운하 공사 현장에서 일하던 매형을 찾아 파나마로 떠났다가, 다시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을 머무르게 된다. 아마도 마르티니크 섬에서의 짧은 경험은 고갱에게 자신만의 화풍을 찾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된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고갱은 고흐의 동생인 테오의 요청으로 아를의 '노란 집'에서 고흐와 함께 지내게 작업을 하게 되지만, 두 사람 사이의 불화가 심해져서 9주만에 헤어지게 된다. 다시 브루타뉴 퐁타방으로 돌아온 고갱이 당시에 남긴 작품 <황색의 그리스도>는 고갱이 개척한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걸작이 된다.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에 반발해서 등장한 상징과 암시를 통해 비현실적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데, 이들 화가들은 예술이 자연세계를 사실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감정이나 아이디어를 반영해야 한다고 믿었다. 

 

화가로서 고갱의 인생을 대표하는 가장 결정적 단어가 있다면 그건 바로 '타히티'일 것이다. 1889년 만국박람회에서 동남아시와와 일본, 태평양의 독특한 문화를 다양하게 접촉하면서 싶은 인상을 받은 고갱은 유럽을 벗어나면 영감이 솟구치는 이상향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전재산을 털어 프랑스 식민지였던 타히티 섬으로 떠난다.

 

하지만 타히티는 고갱이 생각했던 기대와 많이 달랐다. 일체의 유럽 문명이 닿지 않은 이상적 원시로만 생각했던 타히티는 유럽인들이 첫발을 디딘지 이미 100년이 지났고, 식민지 이후 건너온 유럽인들이 이미 기득권층을 정착하고 있었지 때문에 타히티 원주민들에게 유럽인은 이미 익숙한 존재였고, 그런 타히티는 고갱이 기대했던 그런 원시는 아니었다. 

 

2년만에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타히티 소재의 그림들을 전시회에 출품, 잠시동안 기대이상의 명성을 얻게 되지만, 그의 그림에 대한 후원과 판매는 지속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895년 친구들로부터 배삯을 빌려 다시 타히티행 배편에 오른다. 그리고 그 후 그는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가난과 질병, 폴리네시아 당국과의 여러가지 법적 분쟁 등을 겪던 고갱은 1903년 사망한다.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들, 1891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타히티에 가면 고갱 박물관이 있다. 하지만 정작 이곳에는 고갱의 진품은 하나도 없다. 돈이 필요했던 고갱은 그림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배편으로 프랑스에 보내기 급급했기 때문이다. 고갱이 직접 만든 것이라고는 도자기 한 점이랑 목각 숟가락 세 개가 전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