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표현주의 미술은 20세기 초, 독일에서 발생한 미술사조로서 인간의 내면적 감정과 주관적 경험을 극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인데, 사회적 불안과 전쟁의 영향을 반영해 당시까지 유행처럼 퍼져있던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왜곡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로 감정을 시각화하려고 노력했다.
독일 표현주의의 등장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그 첫째는 산업혁명이고 두번째는 1차 세계대전이다. 산업혁명으로 인간의 존재적 가치는 높아진듯 했지만, 기술발전으로 나타난 물질만능주의와 계급 및 빈부격차의 확대는 오히려 인간의 존재가치를 격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 상황에서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독일에서는 제정이 붕괴되고 뚜렷한 정치적 구심점도 사라진 상황에서,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른 배상금 상환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도 극심해져 있었다. 그에따라 독일 국민들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힘겨움을 스스로 이겨내야 하는 상황이었고, 눈앞에 보이는 현실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 등 비현실적 불안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독일 표현주의의 시작을 알린 다리派는 독일 작가 키르히너(Ernst Ludwig Kirchner, 1880~1938년)가 1905년에 결성한 미술단체이다. 키르히너는 1901년 드레스덴의 왕립공과대학에 입학, 건축학을 공부하면서 틈틈이 뮌헨의 미술학교에서 헤르만 오브리스트(Hermann Obrist, 1863~1927년)에게서 회화를 배웠고, 프리츠 브라이엘, 에리히 헤켈, 칼 슈미트 로틀루프 등 몇몇 친구들과 함께 회화와 소묘 모임을 조직했다.
그가 모임에 '다리(=브뤼케, Die Brücke)'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혁명적인 정신과 회화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고자 한 의도였다고 한다. 1906년 드레스덴의 어느 한 푸줏간에서 첫 전시회를 연 다리派는 다른 회원들과의 갈등이 원인이 되어 설립 7년만인 1913년 해체되고 만다. 해체 후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키르히너는 군대에 자원입대했으나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후 이듬해 신경쇠약으로 제대를 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가 그린 그림 <군인으로서의 자화상>을 보면, 그의 얼굴은 무슨 약을 먹은 것같이 누렇게 떠있고 손목은 잘려있다. 게다가 뒤에 벌거벗고 서있는 여자도 뜬금없다. 이 그림은 아직 피카소처럼 형태가 심하게 해체된 상태도 아니고, 마티스처럼 밝고 강렬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지도 않지만,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뭔가 음울하고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1937년 나치정권은 뮌헨에서 정치선전용으로 '퇴폐미술전'을 개최하고 여기에 키르히너도 포함시킨다. 게다가 600여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을 전시와 판매를 금지하고, 심지어 철거하고 파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에 절망에 빠진 키르히너는 1938년 58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당시 나치가 저지른 짓에 비하면 키르히너 같은 예술가들의 그림은 차라리 건전한 것이었다. 어쩌면 차라리 예술을 통해 응어리진 것을 표출하는 것이, 겉으로는 위선을 떨면서 온갖 참혹한 짓을 저지르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가 아닌가 싶다. 키르히너의 죽음과 함께 다리派도 끝을 맞이한다.

드레스덴 지역에 다리派가 있었다면 뮌헨지역에는 독일 미술계의 변화를 주도했던 청기사派가 있었다. '청기사(Der Blaue Reiter)' 즉 '푸른 기사'라는 라는 다소 낭만적인 이름의 이 화파는 1909년에 결성된 뮌헨 신미술가협회 소속 화가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그룹으로서, 러시아 출신의 화가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가 핵심인물이었다. 이들은 1911년에서 1914년까지 불과 4년 정도의 기간 동안 두 번의 전시회와 단 한 차례의 예술연감 '청기사(1912년)'을 발행한 것을 끝으로 공식적 활동을 정리했지만, 서양 미술사에서 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는 결코 가볍지가 않다.
1909년 12월에 개최된 뮌헨 신미술가협회의 1차 전시회에 대해 언론들은 '야수파를 패러디한 듯한 괴이하고 우스운 그림들'이라는 혹평을 늘어놓았다. 뒤이어 열린 2차 전시회에서는 피카소와 브라크 등 인기 작가들의 작품이 함께 출품되기도 했으나 여전히 대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계속된 언론과 대중들의 냉담한 반응은 결국 협회 내부의 갈등으로 연결되었고, 1911년 12월 3회 전시회를 앞두고 칸딘스키는 협회를 탈퇴, 몇몇 화가들과 함께 '청기사'라는 이름의 첫 전시회를 갖게 된다.
청기사派를 주도한 칸딘스키는 모스코바에서 출생, 오데사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모스코바 대학에서 법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교수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896년 30살이 되던 해 모네의 회화작품에 큰 감명을 받은 그는 대학교수로서의 유망한 삶을 포기하고 뮌헨의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러시아 혁명이 끝난 1918년에는 다시 모스코바로 돌아갔다가 1921년 모스코바 미술아카데미의 교수직까지 버리고 다시 뮌헨으로 돌아온다. 그후 1922년에서 1933년까지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바우하우스에 대한 나찌의 정치적 압력이 계속되자 그는 프랑스로 거처를 옮겼고, 1939년에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기도 한다.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칸딘스키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그것은 바로 [점,선,면]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그는 [점,선,면]이라는 기초적인 요소를 활용해, 미술과 음악, 감정이 결합된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했으며, [점,선,면]에 대한 철학적이고 직관적인 해석을 통해 예술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탐구했다. 그가 바우하우스에서 활동하던 1923년에 제작된 작품 <composition 8>은 그의 행태이론과 색채이론을 처음으로 구조적으로 적용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20세기 추상미술의 장을 여는 매우 의미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점,선,면]을 통해 시각적 음악을 구현해 보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그가 <즉흥19>라는 작품을 완성할 즈음, 음악에 심취해 있었는데, 당시 바그너의 '로엔그린'을 감상한 이후 "나는 내 영혼에서 갖가지 색을 보았다. 내 눈 앞에 색이 있었다. 그리고 거친 線들이, 거의 미친듯한 線들이 내 앞에 펼쳐졌다"라는 말과 함께 '로엔그린'의 체험을 찬란한 색채들로 과감하게 캔버스에 펼쳐내기도 했다.

'콘서트'라는 부제가 달린 1911년作 '인상3'은 쇤베르크의 음악을 듣고 완성한 작품이다.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와 연주자, 오케스트라, 그에 열광하는 관중들의 모습들이 꽤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 작품은 [점,선,면] 이론을 장착하기 前의 '따뜻한 추상'의 단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칸딘스키는 [점,선,면]이 개체성, 관계성, 전체성을 나타낸다고 보았으며, 이 요소들이 합쳐져 우주적 질서와 같은 큰 그림을 구성한다고 해석했다. 이러한 요소들이 우리의 일상과 삶을 표현하고 있으며, 단순히 시각적인 구성요소를 넘어서서 우리 존재의 철학적 반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칸딘스키의 [점,선,면] 이론은 현대 추상미술 뿐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건축, 시각예술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접근방식은 형식적 요소들이 감정을 어떻게 자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순수한 형태와 색상 만으로도 작품의 깊은 감정적, 철학적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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