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중심지 빈(Wien)은 인구 200만의 국제도시로서 전기, 철도, 자동차 등 현대사회로서의 형태를 갖추어가고 있는 유럽의 중심지였다. 카페와 살롱을 중심으로 철학자, 과학자, 심리학자, 전위문학가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자유롭고 진보적인 대화를 나누고 활기찬 교류가 일어나긴 했지만, 빈의 주류는 여전히 제국의 엄격한 보수주의가 굳건히 차지하고 있었다.

미술계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1861년에 창립된 '빈 미술가 연맹'은 빈의 유일한 전시공간을 독차지한 채, 공공기관의 공식적인 인정과 후원을 얻어내기 위해 안이하고 정치적인 전시만을 고집하던 상태였으며, 젊은 진보 미술가들의 전시는 허용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897년 4월, 당시 35세의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년)는 다른 19명의 젊은 미술가들을 규합하여 '오스트리아 미술가연합'이라는 새로운 조직을 결성하게 된다.
1898년 3월, 빈 분리파의 제1회 전시회는 약 6만여명의 관람객을 기록하며 대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그들은 그 수익금을 재원으로 분리파를 위한 전용 전시공간을 건축하게 된다. 이 전시관은 건축가인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설계를 맡았고, 동료인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의 아버지이며 당시 가장 부유했던 기업인이기도 했던 카를 비트켄슈타인이 재정을 지원했다. 하지만 창립 이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빈 분리파는 1904년 두 진영으로 다시 분리된다. 응용미술을 강조한 클림트 진영과 순수미술을 강조한 엥겔하르트로 분리된 이후, 이들의 기세도 점점 약화된다.
빈 분리파 창립의 주역인 클림트는 14살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이후 장식 회화가로 교육받는다. 1883년 졸업 이후에는 동생인 에른스트 클림트와 동료인 프란츠 마치 등과 함께 공방을 차리고 건축물 벽면의 회화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당시만 하더라도 지극히 전통적인 사실적 화풍을 견지하던 클림트는 19세기 말 영국, 프랑스 등에서 벌어진 진보적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을 접하게 되면서, 낙후된 오스트리아의 미술경향과 미술협회의 보수성에 반발, 1897년 빈 분리파(제체시온 ; Secession)를 결성하고 아르누보 미술의 거장으로 이름을 떨친다.
당시 빈 대학교는 클림트의 공방에 대강당의 천정화를 의뢰하는데, 대학의 주요 학문인 '철학'과 '법학' 그리고 '의학'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린 3점의 그림은 결과적으로 대학 관계자들을 격분시키게 된다.

<철학>은 지성을 갈구하고 이성을 찬양하는 이미지가 그림에 녹아들기를 바랬던 대학측의 바램과는 달리 스핑크스 같은 불길한 징조이자 부정적인 상징물을 등장시켰고, 좌측에 늘어선 노년에서 아기에 이르는 인간 기둥은 어딘지 모르게 고뇌와 고통으로 가득차 있는 등 인간의 이성이 매우 보잘 것 없음을 드러냄으로써 '철학의 근본을 무시한 모호한 표현'이라는 혹평을 받는다.

두번째 그림 <의학>의 경우, 대학측은 인간의 지성이 이룩해낸 의대한 의술이 인간을 죽음에서부터 건져내는 구원자 역할을 표현해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표현을 둘러싼 논란은 멈추질 않았다. 그림의 중앙에 등장하고 있는 여인은 건강의 여신 '히게이아'인데, 그녀는 그녀의 팔목을 감싸고 있는 뱀에게 죽은 자가 마시는 망각의 강물 '레테의 강물'을 마시게 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림에 등장한 인간들의 죽은듯 누워있는 모습들은 삶의 생동감 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느낌을 주고 있다. 그가 표현하려고 앴던 것은 '히게이아'를 기준으로 오른쪽에는 병과 죽음을, 왼쪽에는 생의 세계를 대비해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대학측의 평가는 혹독하기만 했다.

1903년에 완성한 마지막 그림 <법학>에 대한 대학측의 요청은 정의와 공정함이었지만, 클림트의 그림에는 어두운 공간 속에 노인을 휘감는 문어가 등장한다. 서구에서 문어는 불길한 존재로 인식된다. 말하자면 노인은 엄격한 형벌로 고통받고 있으며 노인 주변에는 죄악과 유혹을 상징하는 세 여인이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그림 위쪽에 정의의 여신들이 먼 발치서 죄인을 지켜보고 있고, 재판관으로 보이는 작은 얼굴들도 보인다. 대학측은 법과 정의 보다는 죄와 형벌에 치중한 그림에 큰 불만을 나타냈다.
결국 클림트의 그림들은 빈 대학측의 거부로 천정을 장식하지 못하고 클림트에게 다시 돌아와 개인들에게 팔려가지만, 훗날 나찌정부에 의해 퇴폐미술로 낙인찍혀 압류당했다가, 안타깝게도 2차대전을 거치면서 화재로 소실된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클림트의 가장 유명한 대표작은 그가 1907~1908년 황금시기에 그린 유화 <키스>가 아닐까 싶다. 이 시기에 그는 도금 기법을 활용한 유화 그림을 다수 그렸는데, <키스>는 계란을 사용하는 템페라 기법과 금박과 은박을 꿀이나 아교 등의 접착제로 붙이는 방법으로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인 그림으로 완성했다. 그림의 두 주인공은 그 자신과 그의 연인인 에밀리에로 알려져 있다.
클림트는 1918년 55세를 일기로 오스트리아 빈의 알저보르슈타트 병원에서 스페인독감 증세가 악화되어 결국 뇌경색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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