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아르누보(Art Nouveau) 미술에 관하여

그림 읽어주는 남자 2025. 8. 31. 13:05

아르누보를 직역하면 '새로운 미술'이라는 뜻의 프랑스語로서 영국과 벨기에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이며, 독일에서는 유켄트 양식(Jugendstil), 이탈리아에서는 리버티 양식(Stille Liberty), 프랑스에서는 기마르 스타일(Style Guimard)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르누보는 19세기 말 유럽에서 일어난 특수한 미술사조로서 1890~1910년 사이의 '세기말'에 유럽과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유행했던 순수미술과 응용미술의 한 양식인데, 일본풍인 자포네스크의 영향을 받아 우키요에의 동양화적 특징처럼 평면적인 느낌의 간략화된 묘사로 공간을 채우는 기법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아르누보의 대표작가인 알폰스 무하의 <황도궁(Zodiac), 1896년>

 

아르누보 미술의 대표작가로는 영국의 삽화가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 1872~1898년), 체코의 화가 알폰스 무하(Alphonse Maria Mucha, 1860~1939년), 영국의 디자이너 에드워드 번 존스(Edward Coley Burne-Jones, 1833~1898년)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년) 등이 있다.

 

아르누보는 순수미술 보다는 주로 공예, 포스터, 건축 장식 같은 응용미술 분야에서 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이는 순수미술 분야는 이미 인상파 등에 의한 혁신적인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던 탓이기도 하다. 특히 공예분야의 아르누보 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 바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년)이다. 그는 대량생산된 조잡한 공예품과는 차별화되는 수공예 작품들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 미술공예운동(Le mouvement Arts et artisanats)'을 주도하기도 했지만, 그 자체는 실해했고, 그 정신과 영향은 남아 아르누보 미술의 원조가 되기도 했다.

 

윌리엄 모리스의 사진 ,1887년

 

윌리엄 모리스는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이며 시인이자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국의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을 확산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영국 에식스주 월섬스토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서양고전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건축가의 길을 걸었다. 1861년에는 에드워드 번존스, 단체 가브리엘 로세티 등과 함께 공예회사를 설립, 태피스트리, 벽지, 직물, 가구 스테인글라스 등을 디자인했으며, 당시 크게 유행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실내장식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대학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1880년대 들어 노동자의 계급 일부가 급진화되는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의 영향을 받아 사회민주연맹에 합류하는 등 혁명사회주의 활동에 헌신하기도 한다. 이 시기부터 그는 디자이너보다는 사회주의 혁명가로서 사회주의 관련 책을 출판하거나 사회주의 동맹을 설립하는 등의 정치활동에 더 전념하게 되며, '예술을 위한 예술'이 아니라 '민중예술'에 더 집중하게 된다.

 

아르누보 미술에서 주목해야 할 또 한 사람의 인물은 바로 알폰스 무하이다. 1870년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의 모라바 변경백국(現 체코)에서 태어난 알폰스 무하는 브르노(Brno)에 위치한 슬라브 문법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했다. 어린시절 어머니로부터 받은 연필 목걸이로 취미삼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프라하의 예술 아카데미에로의 입학은 거절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후 빈으로 거처를 옯긴 무하는 공방에 취직했고, 그곳에서 무대의 배경그림과 커텐 등을 제작하며 장식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연극 <지스몬다>의 광고 포스터, 1895년 알폰스 무하

 

하지만 공방이 화재로 문을 닫자 고향인 모라바로 돌아와 프리랜서로 장식예술과 초상화 작업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그에게 후원자가 나타났다. 모라바의 남쪽 미쿨로프의 쿠헨 밸라시 백작은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城 두 곳의 복원작업을 맡긴다. 무하는 백작의 후원에 힘입어 뮌헨 미술원에서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고, 프랑스 파리의 쥴리앙 아카데미와 콜로라씨 아카데미 등에서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프리랜서로서 잡지에 삽화를 게재하고, 표지를 디자인하며 극장의 무대와 의상 등을 디자인하며 생활하던 그에게 이름을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다가왔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연극배우인 사라 베르나르가 연출한 연극 '지스몬다'의 포스터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이 포스터는 1895년1월1일 파리 시내의 광고탑에 걸리자마자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고, 삽화가 제롬 두세는 이 포스터에 대해 '파리의 모든 시민이 우하의 이름에 친숙하게 만들었다'라는 칭찬을 늘어놓았으며, 파리 시민들은 이 아름다운 포스터를 하루밤에 모두 떼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상업화가로서 전성기를 보내던 무하는 각종 공연의 광고포스터 디자인을 싹쓸이했고, 간간히 인물화와 초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1904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활동을 이어갔다. 1910년 그가 고국으로 돌아온 시점은 그간 유행하던 아르누보 화풍이 짧은 유행을 끝으로 퇴조하던 시기였고, 그도 감각적이고 상업적인 석판화를 버리고 민족주의적인 유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슬라브 서사시> 연작 시리즈이다. 그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약 15년 동안 총 20개의 <슬라브 서사시> 연작을 남겼다. 이 중 3개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알폰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 시리즈1, 1912년作 - 투란족과 고트족의 약탈을 받고 있는 슬라브족

 

<슬라브 서사시> 시리즈2, 슬라브족의 종교성지인 스반토비트, 1912년作

 

<슬라브 서사시> 시리즈20, 슬라브족의 신성화, 1926년作

 

하지만 제2차대전이 발발하고, 체코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알폰스 무하의 애국심과 민족주의는 불온한 사상으로 몰렸고, 그는 게슈타포에 의해 수차례 체포되어 극심한 심문을 당했고, 결국 급성 폐렴에 걸려 1939년 7월 14일에 사망하고 만다. 

 

<슬라브 서사시>를 비롯한 그의 작품들은 유가족들에 의해 나치와 전쟁을 피해 숨겨져 있다가 1960년대 이후 다시 세상에 공개된다. 그는 현대 일러스트레이션의 시조로 평가되기도 한다.